특별기고 미주가톨릭평화신문 cpbc2026년 7월 12일자 8면 전면

태평양 너머로 불꽃을 옮기며

평화의 모후, 미주 최초의 한인 성모성지를 세우게 된 영감에 관한 묵상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성당 전경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성당. 1929년 백문필(필립 페랭) 신부가 세운 신앙의 못자리로, 얼바인 평화의 모후 한인 성모성지 건립의 영감이 된 곳이다.

해 전, 저는 충청남도의 한 조용한 고을 합덕, 그 언덕 위에 자리한 작은 네오고딕 양식 성당의 계단을 올랐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쌍둥이 종탑이 지평선 위로 솟아 고요한 위엄으로 그 일대를 굽어보고 있었습니다. 성당 입구에 다다랐을 때, 미국 태생인 저였지만 평생 한국 천주교 신자들에게서 보아 온 그대로 했습니다. 신발을 벗었습니다.

안으로 들어서니 회중석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가을 햇살이 스테인드글라스를 지나 들어와, 수십 년 경건한 손길에 닳아 매끄러워진 나무 제대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오래된 목재 냄새가 공기를 가득 채웠습니다. 아무도 없었지만, 그 침묵은 그 자체로 누군가 깃들어 있는 듯했습니다. 마치 그 공간이, 그 안에서 무릎 꿇었던 모든 영혼의 숨결을 여전히 품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 순간이 훗날 모든 것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합덕성당은 논과 오래된 농가, 소박한 집들이 어우러진 마을을 굽어보며 서 있습니다. 평평하고 수수한 풍경 위로 오직 이 언덕 하나가 조용한 군주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지은 데는 뜻이 있었습니다. 마을 어느 구석에서도 돌과 스테인드글라스 위에 좌정하신 그리스도를 우러러볼 수 있게 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 뜻대로, 마을 어디서나 그분이 보였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를 시작으로 1950년대 공산주의자들의 폭력에 이르기까지, 이 작은 공동체의 신자들은 자신들이 믿는 바를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바로 이 신자석에서, 한국 교회 역사상 그 어느 본당보다도 많은 시성 순교자와 사제 성소가 나왔습니다. 이것은 고통의 기념비가 아닙니다. 결코 절망에 삼켜지지 않은 한(恨), 그리고 죽음마저 넘어설 만큼 깊은 정(情)의 기념비입니다.

새 성전을 짓는 소임을 맡게 되었을 때, 저는 제게 정말로 주어진 일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 불꽃을 태평양 너머로 옮겨, 이곳에 심는 것이었습니다.

2021년 7월 1일, 저는 캘리포니아 얼바인 평화의 모후 한인 천주교 센터의 주임신부로 부임했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향한 꿈은 저보다 한참 앞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이곳의 신자들이 한 푼 두 푼 정성을 모으며 성전을 꿈꾸어 왔습니다. 그때까지 성지에 대한 계획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저 하나의 센터와 한 공동체, 그리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의 무게를 절감하던 한 젊은 이민 2세 교포 사제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두 세계 사이에 낀 재미 한인들을 어떻게 신앙 공동체의 삶으로 이끌 것인가. 그 고민을 저는 누구보다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저 자신의 고민이었기 때문입니다. 머지않아 그 답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이것은 여러 사업 가운데 하나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 무엇보다 앞서는 일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 고민의 본질은 결코 미사 참례자의 수나 프로그램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뿌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저 자신을 포함하여 수많은 2세 신자들은, 신앙이 어떻게 우리 본국에 전해졌는지, 또 그 대가가 무엇이었는지 그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치열함으로 복음을 위해 싸웠고, 박해 세력이 자신들을 사냥하듯 쫓는 와중에도 온전한 희생으로 하느님께 자신을 바쳤습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는 끊임없는 박해와 숭고한 믿음에 관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의지할 데 없는 자녀들이 모든 장벽을 넘어 전능하신 아버지를 향해 손을 뻗는 사랑이었습니다. 저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젊은 재미 신자들이 이 이야기들을 알기만 한다면, 다시는 신앙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사방에서 짓눌러 오는 서로 엇갈리는 신념들과 사회적 압력 앞에서도, 그들은 떳떳이 자신을 천주교 신자라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 천주교의 유산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열정은 손에 잡힐 듯 뚜렷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저를 차분히 가라앉히셨습니다. 얼바인에 부임하자마자 저는 한국어를 익히러 서울대교구로 파견되었습니다. 서강대학교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한편, 가재울 성당에서 방문 사제로 도움을 드렸습니다. 그 무렵 한국은 여전히 팬데믹이 한창이었습니다. 신자들은 거리를 두어야 했고, 성당의 빈자리는 아주 더디게 채워지고 있었습니다. 학기가 절반쯤 지났을 무렵에야 신자들이 본격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그 더딘 속도는 오히려 제게 배움의 여백이 되어 주었습니다.

서다니엘 신부가 합덕성당에서 미사 후 감사 기도를 바치는 모습
서다니엘 신부가 평화의 모후 순례단과 함께 합덕성당에서 미사 후 감사 기도를 바치고 있다. (2024년 4월)

제가 배운 것은 언어라기보다 한국 천주교 신앙의 결이었습니다. 저는 평범한 한국 천주교 신자들이 기도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기도했습니다. 아직 몸에 익지 않은 언어로 더듬더듬 미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한국 전례에 흐르는 자연스러운 경건함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편안함을 위해 결코 예의를 내주지 않는 경건함이었습니다. 한국 천주교 신자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가르침이 되는 진지함으로 무릎을 꿇습니다. 저는 단지 한국인이 어떻게 말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무릎 꿇는지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합덕이 다시 제게 떠오른 것은 바로 이 시기였고, 저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사무쳤습니다. 저를 움직인 것은 건축물이 아니라, 그들을 이끌 사제가 나타나기 한참 전부터 스스로 신앙을 일구어 낸 평신도들의 거룩한 인내였습니다. 신앙 교육을 받을 길이 거의 없던 그들은 남몰래 서로를 가르쳤습니다. 당진에는 산도 없고, 몸을 숨길 숲도 없습니다. 오직 탁 트인 들판뿐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마을의 다른 이들이 잠든 깊은 밤, 서로의 집에서 기도하고 공부했습니다. 단 한 번의 실수가 곧 발각이요 순교임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그것은 그들을 멈춰 세우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보호하심을 믿으며, 그들은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미국의 한인 교회로 이어가고 싶은 유산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담대했고, 그 담대함은 그들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분께로, 곧 진리이시며 사랑 그 자체이신 분께로 더 깊이 이끌었습니다.

이 유산은 막연한 관념이 아닙니다. 그것을 몸소 살아 낸 한 분이 계십니다. 제가 서 있던 합덕의 그 성당은 1929년, 파리 외방전교회의 프랑스인 선교사 백문필(필립 페랭) 신부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신부님은 1921년부터 선종하실 때까지 이 본당의 제7대 주임신부로 사목하셨습니다. 그분은 그 쌍둥이 종탑을 세우셨고, 현지 장인들을 불러 벽돌과 돌로 들판을 굽어보는 고딕 성당을 지으셨습니다. 그렇게 거의 삼십 년을 그 공동체와 함께하셨습니다. 그러던 1950년 여름, 한국 전쟁이 일어나고 북에서 내려온 군대가 밀고 들어오던 때, 백문필 신부님은 젊은 보좌신부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고는 정작 당신은 떠나기를 마다하셨습니다. 신자들이 숨으시라 간청했지만, 신부님은 제대를 떠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신부님은 성모 승천 대축일 전야에 고해성사를 주시던 중에 끌려가셨고, 본당 회장과 복사를 비롯한 여러 사람과 함께 순교하셨습니다.

새 성전에 마련될 성모 경당 — 한복 차림의 성모자상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 남종삼 세례자 요한 상
새 성전에 마련될 성모 경당. 한복 차림의 성모자상을 중심으로 왼쪽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오른쪽에 성 남종삼 세례자 요한의 상을 모셨으며, 두 순교 성인의 유해가 봉안될 예정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짓는 이 성지가 품은 유산은, 역사 속에 얼어붙은 한순간이 아니라 지금도 이어지는 사명입니다. 1866년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피로부터, 1950년 자기 양 떼를 끝내 버리지 않은 한 프랑스인 사제에 이르기까지, 그 열매는 언제나 같습니다. 자기 목숨을 내어 줌으로써 복음을 전하는, 무모하리만치 영웅적인 사랑입니다.

2024년, 오렌지교구 케빈 밴 주교님께서는 우리 한인 공동체가 짓는 새 성전을 성모성지로 승격시켜 주셨습니다. 하나의 명예로서가 아니라, 바로 그 열정과 사랑에 불을 지피기 위한 방편으로서 말입니다. 이 터를 닦아 가는 여정 내내 평화의 모후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을 체험하면서, 이 성당을 순례 성지로 봉헌한다는 것이 밴 주교님과 우리 모두에게 분명한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성지라는 이름은 없던 것을 새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한국 순교자들의 불꽃을 이 땅에 옮겨 심으려던 우리의 사업이, 어느새 모든 민족에게 그리스도의 평화를 전하는 단 하나의 사명 그 자체가 되어 있었음을, 교회가 비로소 알아보고 그 이름으로 불러 준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결코 꺼뜨려서는 안 될 불꽃입니다.

평화의 모후 본 기고문은 미주가톨릭평화신문 2026년 7월 12일자 8면 전면에 게재된 특별기고를 옮겨 실은 것입니다.
평화의 모후 한인 천주교회 · Our Lady of Peace Korean Catholic Center